마트 카트를 밀다가 손이 멈춘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경기 회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작 장바구니에 뭔가를 담으려다 가격표를 보고 다시 내려놓게 되는 그 순간. 그게 지금 우리 대부분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2026년 1분기에 3년 만의 최고 성장률을 기록했다는 소식이 그래서 더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K자 소비, 숫자 뒤에 가려진 균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2026년 1분기 카드 지출 총액은 4,280억 달러였습니다. 럭셔리 리테일 지출은 전년 대비 18% 증가했고, 고급 항공권 소비도 12% 늘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미국 경제는 훌훌 날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CEO 스티브 스쿼리가 실적 발표 자리에서 직접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미국 경제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아멕스의 실적은 미국 최상위 소득층 소비의 바로미터일 뿐, 경제 전체의 건강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이 이 현상을 설명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K자 소비입니다. K자 소비란 알파벳 K처럼 소득 계층에 따라 소비가 위아래로 갈라지는 구조를 말합니다. 위쪽 선은 고소득층의 지출이 계속 올라가는 방향, 아래쪽 선은 저소득층의 지출이 꺾이는 방향입니다. 같은 경제 안에서 두 개의 전혀 다른 현실이 동시에 진행되는 셈입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실제 카드 결제 데이터를 보면 이게 수치로 확인됩니다. 2023년 12월 기준 고소득층 카드 지출은 전년 대비 2.4% 증가했지만, 저소득층은 0.4% 증가에 그쳤습니다. 무려 여섯 배 차이입니다. 설문이 아니라 실제로 긁힌 카드 데이터라는 점에서 이 수치는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숫자를 봤을 때 솔직히 놀랍지 않았습니다. 제가 체감하는 현실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증시는 오르고 있고, 덕분에 주식 평가액도 조금씩 늘고 있지만, 그게 곧바로 생활비 여유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팔아서 통장에 찍히기 전까지는 확정된 돈이 아니고, 설령 실현된다 해도 그 수익은 생활비가 아니라 다른 경제 활동의 밑천이 됩니다.
트레이딩 다운, 중산층이 보내는 신호
저소득층이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면, 중산층은 지금 전략을 바꾸고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트레이딩 다운(Trading Down)이라고 부릅니다. 트레이딩 다운이란 소비자가 기존에 이용하던 상품이나 서비스보다 더 저렴한 등급으로 소비를 낮추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명품 대신 가성비 제품, 외식 대신 대형마트 대량 구매로 이동하는 현상입니다.
이게 데이터로도 드러납니다. 2025년 맥도날드 CEO는 실적 발표에서 저소득층과 중산층 방문객이 거의 두 자릿수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스타벅스 커스텀 음료 한 잔이 7~8달러, 한화로 만 원을 넘어서면서 중산층이 이마저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패스트푸드와 커피숍은 재량 지출 중에서도 가장 작은 단위에 속합니다. 그 단위에서도 소비가 꺾인다는 건 중산층의 여유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신호입니다.
저도 비슷한 변화를 느낍니다. 예전엔 별 생각 없이 집어 들던 것들을 이제는 한 번씩 고민하게 됩니다. 경기가 좋아졌다는데 왜 이럴까 싶다가도, 따져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물가는 가파르게 올랐고 월급은 거의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실질 구매력이 줄어든 것입니다.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현재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저소득층: 팬데믹 지원금이 소진된 이후 신용카드 리볼빙으로 소비를 이어갔으나, 현재 연체율이 20%를 돌파했습니다. 전체 카드 부채는 1조 2,800억 달러 수준입니다.
- 중산층: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소비 등급 자체를 낮추는 트레이딩 다운이 진행 중입니다. 패스트푸드조차 줄이기 시작했다는 기업 실적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 고소득층: 유가 상승이나 물가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럭셔리 소비와 고급 여행 지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비행기 안에서 퍼스트 클래스는 샴페인을 마시고, 이코노미석은 좌석 수가 줄고 있는 구조입니다. 미국 상위 소득층이 전체 민간 소비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출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 이 구조가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소득 불균형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파장
문제는 이 불균형이 미국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대미 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약 18%로, 미국은 단일 국가 기준 최대 수출 시장입니다. 수출 상위 품목은 반도체, 자동차, 가전인데, 이 품목들은 대부분 고소득층 소비재이거나 기업 설비 투자재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표가 소비자신뢰지수(CCI)입니다. CCI란 소비자들이 향후 경기와 자신의 재정 상황을 어떻게 전망하는지를 수치화한 지표로, 이 숫자가 떨어지면 기업들은 설비 투자를 줄이고 신규 구매를 미루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미국 중산층의 트레이딩 다운 현상이 심화될수록 CCI가 하락하고, 그 여파가 한국 수출에 고스란히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실제로 달러 대 원화 환율이 1,500원에 육박하고 있는 현 상황은 이미 그 압박이 환율에 반영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원화 약세는 수출 단가 측면에서는 일부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수입 물가를 끌어올려 국내 소비자 물가 상승을 가속화합니다. 이미 장바구니 앞에서 손을 멈추게 하는 그 압력이 사실은 미국의 소득 불균형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5년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주요 생필품 가격은 전년 대비 상당 폭 오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은행). 경기 지표가 개선되는 것과 체감 경기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도 주식 평가익이 조금 늘었다고 해서 마트 카트에 더 많은 걸 담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평가익은 팔기 전까지 내 돈이 아니고, 설령 수익을 실현해도 그 돈은 생활비가 아니라 다음 목돈을 만들기 위한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금 미국 경제가 버티고 있는 건 소수의 고소득층이 지갑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 자체가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GDP나 소매 판매 같은 총량 지표 뒤에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균열이 가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뉴스에서 경기 활황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제 월급명세서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됩니다. 경제 지표가 아니라 그게 제 현실의 기준입니다. 미국 경제의 소비 불균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시 지표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내 현금흐름에 기반한 냉정한 판단일 것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 또는 금융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및 자산 관련 결정은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